경제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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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22년 대선 직전에 출간된 저서 《재정전쟁》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대통령이 연금과 교육 분야의 개혁에 불을 지피고, 이에 더해 노동개혁과 조세개혁까지 이룰 수 있다면 영조나 정조의 반열에 근접할 수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만큼 개혁이 어렵다는 것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동시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요한 사안을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며 피해가는 집권자들을 걱정하는 시선도 담겨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에 새롭게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정부에서 연금-노동-교육개혁을 새 정부 핵심 정책 과제로 선정했습니다. 윤대통령은 평생 검사로 재직했던 분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도지사 같은 국정 운영 경험은 없지요. 따라서 개혁은 차치하고라도 일반 정책 수행의 관점에서도 그다지 준비된 것 같지 않은 대통령이라 볼 수도 있는데, 역대 정부에서 피해가던 개혁 과제를, 그것도 동시에 세 가지나 내세웠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나중에는 정부개혁의 필요성도 추가했는데, 사실 이 중 무엇 하나 쉬워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중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것도 버거울텐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손대면 힘만 분산시키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적자원과 관련된 교육, 노동, 연금, 저출산 분야 등은 연계성, 보완성이 강한 영역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 함께 다루는 것이 오히려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 문제를 못 풀면 출산율을 높이기 어렵고, 출산 모멘텀을 되돌리지 않으면 연금개혁을 완성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임기 2년을 채워가는 현 정부의 연금-교육-노동 3대 개혁은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고 있는 걸까요. 일단 교육은 수능 킬러 문항을 둘러싼 공방이나 사교육 카르텔 같은 비리 적발 사례는 있었지만, 근본적 개혁을 위한 청사진은 보이지 않습니다. 노동의 경우도, 2023년 봄 주당 근로시간의 유연화 시도가 강한 반발에 부딪친 다음, 별다른 얘기가 없습니다. 그나마 개혁 논쟁이 활발해지고 있는 분야가 연금 개혁인데, 아직은 연금 기금의 고갈을 막기 위한 몇 가지 시나리오 제시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저출산 문제의 경우도 기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진척된 내용들은 있지만 뭔가 획기적인 방안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부개혁은 방향성조차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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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가 개혁이 가져올 미래 비전을 말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구체적인 정책 어젠다로 삼으려면 많은 고민과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청사진이 필요하고, 이를 구현시킬 전략과 동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가 이번에 출간한 <개혁의 정석>에서 누차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지면 그 열매가 몇 세대에 걸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몇 년짜리 임기의 정권이 굳이 모든 것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덧붙였습니다.

문제는 개혁을 다루는 방식이 일반 정책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현 정부가 개혁의 틀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개혁의 구체적 목표와 전략이 담겨있는 청사진이 잘 보이지 않고, 아울러 이를 추진할 개혁 동력 역시 강해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다양한 개혁 과제를 해당 부처가 적당히 나누어 관리하는 기존의 백화점식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개혁 과제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부처별로 일을 나누어하다보면, 예산이나 인력 등 정책 자원의 배분도 애매하고 정치적 지지를 모으기 위한 전략 수립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위원회 방식 또한 한계가 분명합니다. 실질적인 결정 권한이 없고 예산이나 인력에 한계가 있는 위원회의 경우 자칫 부처 관료들에게 아이디어나 제공하는 집단에 머물기 쉽습니다. 과거 경험을 보면 위원회가 정권이 뭔가 일을 하고 있다고 생색내는 면피형 수단에 불과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한 예로 예전에 일자리 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도대체 이런 위원회가 왜 필요한지 알기 어렵습니다. 일자리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요?

현 정권이건, 다음을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이건 간에 정말 나라 미래를 위해 단 한 가지 분야에서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개혁 과제들의 성격과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냉철하게 파악해 목표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실천 가능한 전략을 구상해야 합니다. 뜬구름 잡는 식의 추상적 목표만 나열하거나 너무 세부적인 사안 몇 개에 집착하는 방식으로는 아까운 시간과 자원만 낭비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정책의 경우, 과거 경험이 보여주듯 막연한 당위론만 앞세우며 부분적인 제도 개편이나 현금 지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몇 발자국 못 나갈 것입니다.

노동개혁은 아무리 합리적인 사안이라도 일단 이념 대립의 함정에 빠지면 타협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연금개혁이나 교육개혁과 같이 전 국민이 이해당사자인 사안의 경우 정치적 이해관계나 따지는 나약한 의지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개혁에 필요한 재원 확보는 물론 날로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도 조세개혁은 필수이지만 언급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개혁의 주체를 대상으로 삼아야하는 정부개혁은 위기와 같은 특별한 시점이라면 모를까, 평시에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제 책 <개혁의 정석>에서 제시한 것처럼 규제개혁을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식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개혁이라도 완수하려면 기존의 사고 틀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제 책의 출간 시점 기준으로 집권 2년차를 마무리해가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개혁 정책을 단정지어 평가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정치적 저항이 강하기 마련인 개혁 과제는 힘 있는 정권 초기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린 얘기입니다. 제 책에서는 개혁의 골든 타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개혁 과제의 성격에 따라 청사진, 공론화, 정치적 타협이라는 세 가지 개혁 공식의 시점과 지속 기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청사진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 정권을 이어가는 개혁의 단초를 놓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업적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개혁 같은 개혁을 본 적이 없었던 데에는 임기 내에 뭔가 마무리를 해야만 자신의 업적이라 여기는 집권자들의 이기적인 조바심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권 2년이 지나도록 분야별로 변변한 개혁 청사진이나 구체적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문제가 뭔지 모르면 해답이 나올 리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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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을 추진하려면 저항 세력이 많기 마련입니다. 특히, 기득권 세력이 힘이 센 부족인 경우 정권의 힘 만으로는 공략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럴수록 시대흐름을 타고, 시장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 책에는 위기를 개혁의 기회로 삼은 김대중 대통령, 시대 전환기의 흐름을 기회로 삼은 레이건 대통령의 성공 사례가 나옵니다. 반면, 시대흐름을 거스르며 자신의 정치이념을 밀어부치려던 영국 트러스 총리의 실패사례도 언급합니다. 또한 진보 정치인이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집권한 클린턴의 성공적 처세 방식도 언급했습니다.

제 책에서는 대한민국이 직면한 개혁 과제를 밀어부칠 동력으로 재정의 힘과 시장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세수를 확보해 개혁 재원을 마련하고, 시장의 힘을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의 행동 유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2022 3월 대선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윤석열 대통령은 시장원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주의를 강조한다 해도 시대 흐름을 거스르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지금처럼 복지, 환경, 의료, 산업정책 등 여러 분야에서 예전과 다른 적극적 정부 역할이 강조되는 시기에 ‘작은 정부형 개혁’에만 집착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2022년 가을, 재정 환경이 열악한 상태에서 레이건식 감세 개혁을 해보려던 영국의 트러스 총리는 시장의 반격 한 방에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진했습니다. 시대흐름은 정방향으로 타야하고, 시장의 힘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수 정권도 얼마든지 적극적인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빚낸 돈으로 생색내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무너진 재정규율을 바로잡아 정부 재정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정부개혁의 또 다른 축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 신뢰도가 높아지면 세수 확보의 걸림돌인 조세 저항을 낮출 수 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소극적인 정부가 아니라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는 정부이지요. 진보건 보수건 현 시대 상황에서의 최선의 선택은 정부 효율과 신뢰를 바탕으로 충분한 정부 재원을 확보해 한편으로 복지 확대 등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다른 한편으로 개혁 추진 동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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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을 정기 국회의 최대 쟁점은 새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최고 법인세율 3%p 삭감안이었습니다. 새로 집권한 보수 정부는 기업 활력 회복을 위한 감세 정책에 정권의 정체성을 걸었습니다. 당시 저는 취지는 좋지만 방법은 달라야 한다는 내용의 SNS 메시지(유튜브 및 인스타그램: kcef21)를 국회 주변에 돌렸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법인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세수 감소 효과가 큰 세율인하보다는 투자유인에 집중해 유효세율을 낮춰주고,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 활력을 제고하는 것이 시대 조류에도 맞고 보수 정권의 정체성도 살리는 길이라 강조했습니다.

그래도 새 정권이 첫 칼을 뽑은 것인데 그냥 물러서는 것은 아니다 싶어 여야의 체면을 세워주는 1%p 감세안을 절충안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저의 찍기신공에 감탄했지요.

당시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유행했는데 역삼동에 자리 잡은 우리 연구소 팀원들은 저보고 송중기처럼 미래를 다녀왔냐고 농담조로 물었습니다. 우쭐해진 저는 앞으로 나를 ‘역삼동 송중기’라 불러 달라고 했는데 다들 표정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냥 다 나가버렸습니다. 착각은 자유고 과장은 본능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가끔은 뒤돌아보며 필요한 궤도 수정이 있으면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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